참고로 저기서 나온 학살의 주체가 외세인 일본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나라사람이었던 조선 관군이란 게 함정... 이전 매체에서는 마치 일본군이 직접 주체가 되어 인간사냥을 한 것 마냥 묘사하는데 진실은, 애시당초 소규모였던 일본군이 5천여명의 조선 관군을 앞세우고 뒤에서 지휘를 하였고, 우금치전투 학살극의 주체는 오히려 우리 관군이었던게 역사의 아이러니죠. 제발 역사를 보고싶은 쪽으로만 왜곡해서 보지 마시고, 왜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당대를 객관적으로 고찰해보고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금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전봉준이 군사적 지식이 조금이라고 있었더라면 우금치에서의 참패는 없었는데 일본과 조선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병력대부분이 전멸당하는 참패를 맛보고 자신도 체포를 당하여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원인은 병력의 많음을 알고 적의 사정을 모른채 병력을 파상공격으로 밀어 붙였다는 것이고,적의 신식무기의 위력을 몰라 낭패를 보게 된다.
추측인데 처음에는 녹두장군 옆에 책사가 있었던것 같아요 홍계훈의 경군 깰때 망태를 앞세워 스피드하게 밀고들어갔어요 그때 안개가 있던가 동 틀때 쳤을껄요 신식무기 위력을 알았다고 봐야죠 초기 관군 보부상 연합과 싸울때도 작전이 있었어요 그런대 우금치는 너무 작전이 없었어 일부 우회시켜 경기도로 들어갈수 있는데 고갯길에 무장도 제대로 안된 민병으로 밀어붙인건 참...
형님 정말 많이 기다렸습니다 연말 정도에 아주 재밌는 영상 두개만 남기고 떠나신줄 알았는데요 ㅠㅠㅠ 정말 처절하게 싸웠던 우금치 전투를 다루어주시니 정말 큰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임진왜란에 용인전투,6.25의 사창리 전투,월남전에, 논란이 많은것중 하나인 롱탄전투 이외에는 아예 승전사 체널도 파시는걸 추천드려요 형님 유튜브에도 신경 많이 써주세여 ㅠㅠㅠㅜ
전투에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게 병력을 좁은 통로에 긴 줄로 밀어넣는 축차투입인데, 기관총이라는 신무기 앞에 그것도 경사가 상당했던 우금치 고개에서 1km 거리를 축차투입 시킨건 미친 짓이었습니다. 초반에 전주성 함락시켰을때 조정과 휴전하지 말고 그냥 그 기세로 계속 북진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조상님들이 피땀눈물로 싸운 이땅의 후손으로...뼈아픈 패전사지만... 그때 상황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왜...돌격만 수십번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야간 기습을 한 황토현 전투나 장태를 이용한 황룡촌 전투도 있지만... 너무 기세가 높았기에 게릴라 전을 생각하는 것보다 일본놈과 일본지휘를 받는 관군에 대한 적개심이 넘쳐서 감정적으로 돌격한것이 아닐까요? 무모한 전투는 안따깝지만 목숨을 걸어서라도 우금치 고개를 넘어 일본놈들과 부패한 정부에 대한 분노로 죽어가는 수많은 시신들을 보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돌격할때의 마음은... 그 당시 관군 지휘관의 수기에도 나와있듯이 그들의 돌격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 달려오는 것이 말로 표현 못할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무서웠다고 합니다. 그 당시 상황을 모르고 말할 상황은 아닌듯 합니다.ㅠㅠ 살기 보다 이곳에서 싸우다 죽게다는 마음이라면....이것처럼 마음 아픈 상황도 없지요. 못다 이룬 원혼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정의 평화 진실은 힘을 길러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진리를 조상님들이 피땀눈물로 보여주셨다고 생각하면 후손들이 명심하고 나라를 발전시키고 자주국방력을 더욱더 끼워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user-rv8uo8ep6k 글쎄요 첫째 돌격때 개박살난후 기동로에 대한 몇가지 의견도 있었고 전봉준이 단순하게 전략능력이 없다 이렇게만 서술돼는데 전멸까지 꽤 시간이 있었고 여러번 돌격이 있었는데 왜 그럴수밖에 없었는지 고찰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이정도 깊이까지 들어가려면 거의 학자급 사료수집 능력이 있어야 하니 아쉽다 정도지만 말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금치에 대한 지형도, 그에 대한 한정적인 이동방향, 일본군과 관군의 배치도 등등 전사이해에 필수인 내용이 거의 없으니 이부분을 보강하지 않는다면 이 채널의 중요도는 그냥 교과서에 나온 내용 이하이상도 아닐것입니다
이건 뭐 분석할 가치도 없는 전투 아닌가? 아니 기관총 화망안으로 좁은 고갯길에서 부적붙이고 죽창들고 돌격했다는데 더 이상 뭔 이야기를 할까? 비슷한 시대에 영국과 싸웠던 줄루족도 이렇게는 안 싸웠다. 군사령관의 역량을 평가한다면 졸장 중의 졸장이라고 밖에는 무슨 말을 할까?
조선말기 조정은 문제가 많았음. 탐관오리 천지에다가 숫자가 얼마안되던 외국 군대도 하나 통제 못했으니 말이죠. 당시 일본 군대가 아무리 쌔다해도 일단 일본을 떠나 조선에 발을 붙인 이상은 보급 문제로 계속 싸울 수는 없기 때문에. 일본군이 조정을 장악하기 전 충분히 막을 수도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고종이 감금 당해버릴 정도면 망해도 이미 망해버릴 정도였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구지 동학이 아니여도 조선은 일본에 먹히게 되있었던 것이라 보죠. 글타고 동학이나 천도교 편드는 것은 아니고요. 구테타로 바뀐 세상도 여럿있지만 할려면 좀 쳬계적으로 하던가하지 무수한 조선 양민을 죽게한 그 수뇌부도 상당히 무식한 거죠.
사회가 발전하려면 위정자들이 깨끗하고 현명한 것도 중요하지만 민중들이 아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이런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수만명의 사람이 모였는데 기본적인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니... 그리고 기관총 앞에서 주문을 외우는 미신에 심취해 있으니 신문물로 무장한 일본을 이길 수 없는 법이죠. 민중이 깨어나야 시대가 발전합니다.
잘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동학군은 엄연히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동학이라는 사이비종교가 창설한 사설반란군이었습니다. 아무리 조병갑이 탐관오리라고 해도 당시는 엄연히 조선전제군주시대였고, 이런 시대에는 백성은 왕의 대리인인 관리들이 부당하게 때려도 그냥 군소리 없이 매맞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이 외세에 힘을 빌려서 동학군을 진압한 것은 민족사적으로는 비난 받을 수 있지만 당시 조선조정입장에서는 하나의 통치 옵션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조선 관군들의 개틀링 기관총은 어디서 왔을까요. 외세의 지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게틀링 기관총의 무서움을 경험한 동학의 후예들은 이후 일본에 붙어서 일진회를 만듭니다. 물론 나중에는 일본에 배신당하지만 결국 조선조정과 동학교도들 모두 바뀐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들끼리 집안싸움하다가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겁니다. 물론 조선조정의 왕족들은 대부분 일본제국의 패망전까지 대우받으며 일본에서 잘살았습니다. 배신당한 일진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죠. 동학과 조선조정 둘다 조선 전제군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차피 동학에 가담한 대부분의 민중들도 배고파서 가담한 거지 무슨 큰 뜻이 있었다고는 생각안합니다. 이시기 대다수 동학교도들의 입장은 한양의 임금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화를 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식층대다수가 주자학을 배우다 보니 임금이 배고픈 우리를 돌봐야하는대 맨날 못된 놈들만 관리라고 보내니 얼마나 화가 날까요. 문제는 그못된놈들도 그나름의 못되진 사정이 있다는 겁니다. 당시의 조선경제는 가렴주구라는 잘못된 경제구조를 운영하지 않으면 나라가 안돌아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매관매직이 성행하니 당연히 청백리하는자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자겠죠. 여기에 윗선에서는 어째서 상납이 없냐고 엄청 갈굴겁니다. 조병갑은 조선이라는 왕조체제에 지극히 충실한 인간이었습니다. 그시기 청백리 없었습니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했지요. 결국 조선은 그자체의 절대군주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이후 조선민중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사람들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고난의 시간들이 필요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야하며 우리가 세계를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만 보다가는 오늘날의 아프간이나 우크라이나의 신세를 면치 못할 거라고 봅니다.
사실상 전투에 무지했던 전봉준이 패전했다고 다들 욕하지만 그보다 더나쁜건 일본군과 합세해 같은동족 학살에 앞장선 관군들이야말로 더 때려쳐죽일 놈들이었고 오히려 욕을 처먹어야 되는일 아닌가? 상대에 비해 너무도 열악한 전투를 벌여 비록 패하긴 했지만 외세와 불의에 저항했던 동학의 정신마저 깡그리 무시당한채로 욕먹을 일인가? 그러지마라 어리석은 후손들아.
동학농민군이 태인전투를 끝으로 와해되었다고 하시는데 그건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만 와해 되었을뿐 북접군은 건재했고 이방언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장흥부를 점령하기까지하고 12월 말까지 격전이 계속되었습니다 가장 최후의 전투가 1895년 2월 18일에 25명의 농민군 접주급들이 항전한 대둔산 전투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 마지막 전투까지 참여했습니다 우금치 전투가 끝이 아니에요(그리고 농민군 잔여세력들은 1899년 농민봉기까지 일으킴)
진짜 댓글들 어메이징하다. 탐관오리에 의한 착취, 계급적 착취에 못이겨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당연한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학농민운동은 사이비종교라느니 이후에 일진회가 되었다느니 대체 이런게 뭐가 중요함?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댓글만 보면 무슨 탐관오리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거고 들고 일어난 농민들은 쳐죽어도 할말 없는 놈들 같네 진짜 어질어질하다. 아니 그냥 '탐관오리의 횡포와 계급적 차별이 극심해지니 농민들이 이에 반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라고 단순하게 정리하면 안됨?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듦?
라스트 사무라이는 메이지유신 당시 삿초 동맹군이 막부타도하는 과정에 신구대립에 정통성을 위해 천황이 중심이라는 체제개편 종식후 신식 군대 무장한 막부폐지후 일본 중앙 정규군이 그걸 그대로 우금치에서 조선동학은 폭도들이 중심인 대의가없던 농민반란을 상대로 군사상륙 사전 실전 훈련한것임
너무나 영화같았던 라스트 사무라이 실사판 우금치 조선을 한반도의 치욕이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우금치에 다 들어있음 정말 싸움을 못하는건 그렇다쳐 어떻게 하나같이 전술이 다 저 모양인지 ㅎㅎㅎㅎ 저런 3류들을 혁명이라는 그럴사한 단어로 빨아야 하는게 국사라면 차라리 안가르쳐 주는게 낫다고 봄
여기 댓글에서 동학군도 개틀링건을 수중에 넣었다는 이야기 있기에 전봉준의 돌격전술에 대해 전봉준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즉 동학군도 개틀링을 쏘아본 결과 급속가열과 정비불량으로 고장이 잘 나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거죠. 임란때도 대마도에서 바친 조총을 쏴보고 신립장군이 쏜다고 다 맞냐 라고 햇듯이 말이죠. 즉 숙련자와 이 병기의 효율적 운용전술이 있을수도 있게다는 것을 생각 못 한 결과. .신립의 탄금대 전봉준의 우금치가 발생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돌격시킬때 획득한 개틀링을 쏘아본 결과 곧 고장나리라 믿고 돌격시킨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첨단무기라해도 관리와 훈련이 중요하죠. 미군이 천조라는 국방비를 쓰는 것도 사실 따지고보면 다 관리비용, 훈련비용. 군대에 대한 이해가 동학군은 없었던 거죠. 구식군대든 신식군대든 장비의 관리와 훈련은 필수고 여기서 전술운용이 나오는 건데 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조선말기 병폐가 심각한 상황에서 그러한 것을 바로잡고자 일어난 민중운동이 바로 동학농민운동 시대적 한계로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 의의는 되새겨야 합니다 동학에도 많은 무리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나중에 아시아의 나치 일본에 부역하게되는 일진회무리도 있었던 반면 왜.구들을 파리잡듯 했던 김구선생도 청년기를 동학에 몸담았었죠
해당 영상은 동학측의 입장에서 다룬거라 동학농민전쟁 시기 조선군에 대해서는 해당 블로그의 조선후기 ~ 대한제국 카테고리의 동학농민전쟁 글들을 읽어보는게 났습니다 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kumi17cs1013&logNo=221546312593
소총 구매했죠. 당시 조선군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하려고 레밍턴 롤링블록 소총과 마티니 핸리 소총, 마우저 1871, 그리고 그라스 소총도 구입했는데 외교와 정치적인 이유로 구입하다 보니 호환이 안됐죠.(단, 레밍턴 롤링블록과 마티니 핸리 소총은 탄약이 호환됐습니다.) 그 결과 보급에 큰 차질을 빚었죠.
전봉준장군은 거의 정신적지주개념이고 지휘하기로 하던 장수는 부친이 전날 돌아가셔서 상주된 도리를 지킨다고 집으로 돌아갔고, 총 모인 농민 5만여명중 실제로 좁은 지역에 밀려 들어갈수 없어서 싸울 1만여명을 제외하고 모두 돌려보냈슴니다 야사개념의 뒷이야기나 알지못하는 정보는 정말 잘조사하셨는데 이번거는 일정부분 부족하네요 감사합니다
참고로 저기서 나온 학살의 주체가 외세인 일본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나라사람이었던 조선 관군이란 게 함정...
이전 매체에서는 마치 일본군이 직접 주체가 되어 인간사냥을 한 것 마냥 묘사하는데 진실은, 애시당초 소규모였던 일본군이 5천여명의 조선 관군을 앞세우고 뒤에서 지휘를 하였고, 우금치전투 학살극의 주체는 오히려 우리 관군이었던게 역사의 아이러니죠.
제발 역사를 보고싶은 쪽으로만 왜곡해서 보지 마시고, 왜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당대를 객관적으로 고찰해보고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금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전봉준이 군사적 지식이 조금이라고 있었더라면 우금치에서의 참패는 없었는데 일본과 조선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병력대부분이 전멸당하는 참패를 맛보고 자신도 체포를 당하여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원인은 병력의 많음을 알고 적의 사정을 모른채 병력을 파상공격으로 밀어 붙였다는 것이고,적의 신식무기의 위력을 몰라 낭패를 보게 된다.
정말 목빠지게 기다렸네요
롱탄고무농장 전투랑 장진호,용인전투좀 이루어주세요
노력하겠습니다
예전 노무현때 청와대 홍보수석이 조병갑 중손녀였는데 조병갑 쉴드치다 사과함...
그 년 유명했지 ㅋㅋ
영화 카슘공방전 이후 이야기인 수단의 옴두르만 전투도 다루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종교 세력(마흐디 교도)와 신식 무기를 갖춘 군대(영국군)의 싸움에서 마흐디교도들이 결국 패하는데 여러가지 의미로 우금치 전투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서요 ㅎㅎ.
잘보았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기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
언제나 좋은영상 감사드립니다
항상 승리의역사가아닌 패전사라는 색다른 시각에서 접하니 모르는사실도 많이 알게되었고 흥미있게잘시청하고있습니다
항상 좋은 영상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상은 바른지 모르나. 전투에서 아군의 인명을 경시하는
전략을 사용한 걸로 보아. 결국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사상을 버렸기에 패배한 것.
좋은 영상 몰랐던 역사
고맙습니다
인내천 사상은 훌륭했지만 군사 병법 무기 세계정세 등에서 지극히 시대착오적이고 최악의 병크였습니다ㆍ저 학살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종과 민비에 있고 최소한 민생을 살폈으면 애초에 저 비극은 일어나지도않았음
탐관오리 조병갑은 그 후로도 썩어빠진 조정에서 계속 감투쓰면서 잘-먹고 자-알 살았드래요.
그 후손도 역시 호위 호식 했드래요.
참, 세상 불공평하지요..
조병갑 증손녀가 노무현 때 청와대 수석이었던 조기숙입니다. 딱 민주당스러운 임명이지요
추측인데 처음에는 녹두장군 옆에 책사가 있었던것 같아요 홍계훈의 경군 깰때 망태를 앞세워 스피드하게 밀고들어갔어요 그때 안개가 있던가 동 틀때 쳤을껄요 신식무기 위력을 알았다고 봐야죠 초기 관군 보부상 연합과 싸울때도 작전이 있었어요 그런대 우금치는 너무 작전이 없었어 일부 우회시켜 경기도로 들어갈수 있는데 고갯길에 무장도 제대로 안된 민병으로 밀어붙인건 참...
저도 공감해요 동학군의 병력수를 고려하면 충분히 포위공격이나 우회도 가능했을텐데 ...
형님 정말 많이 기다렸습니다
연말 정도에 아주 재밌는 영상 두개만 남기고 떠나신줄 알았는데요 ㅠㅠㅠ
정말 처절하게 싸웠던 우금치 전투를 다루어주시니 정말 큰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임진왜란에 용인전투,6.25의 사창리 전투,월남전에,
논란이 많은것중 하나인 롱탄전투
이외에는 아예 승전사 체널도 파시는걸 추천드려요
형님 유튜브에도 신경 많이 써주세여 ㅠㅠㅠㅜ
넵 감사합니다!
전투에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게 병력을 좁은 통로에 긴 줄로 밀어넣는 축차투입인데, 기관총이라는 신무기 앞에 그것도 경사가 상당했던 우금치 고개에서 1km 거리를 축차투입 시킨건 미친 짓이었습니다. 초반에 전주성 함락시켰을때 조정과 휴전하지 말고 그냥 그 기세로 계속 북진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어짜피 동학군은 중앙의 캐를링까지 무장한 중앙군 만나면 학살당합니다. 더구나 전봉준이 인명경시하는 개돌격만 하는 종교장군 수준의 또라이라서..
맥심 기관총은 학살을 막기 위해 개발 된 건데 오히려 더 많은 학살을 일으키는 무기가 됨......
그래서 1차대전때 기관총에 대항하기위해 탱크라는 무기가 발명된거고
동학농민들도 개틀링기관총을 얻었는데 어떻게 써야 했는지도 몰랐음...
개틀링 기관총은 총이 빨리 달궈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물로 식혀야 하고 총열도 제때 바꿔줘야 합니다. 농민군이 그런 부분까지 알기 어려웠으리라 봅니다
@@shinbiapt.8627 터큰문제는 총알일겁니다.
우금치를 넘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실패하였을 것임
한줄 요약 조선과 조상들은 유사인류 수준이었다
조상님들이 피땀눈물로 싸운 이땅의 후손으로...뼈아픈 패전사지만...
그때 상황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왜...돌격만 수십번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야간 기습을 한 황토현 전투나 장태를 이용한 황룡촌 전투도 있지만...
너무 기세가 높았기에 게릴라 전을 생각하는 것보다 일본놈과 일본지휘를 받는 관군에 대한 적개심이 넘쳐서
감정적으로 돌격한것이 아닐까요?
무모한 전투는 안따깝지만 목숨을 걸어서라도 우금치 고개를 넘어 일본놈들과 부패한 정부에 대한 분노로
죽어가는 수많은 시신들을 보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돌격할때의 마음은...
그 당시 관군 지휘관의 수기에도 나와있듯이 그들의 돌격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 달려오는 것이 말로 표현 못할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무서웠다고 합니다.
그 당시 상황을 모르고 말할 상황은 아닌듯 합니다.ㅠㅠ
살기 보다 이곳에서 싸우다 죽게다는 마음이라면....이것처럼 마음 아픈 상황도 없지요.
못다 이룬 원혼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정의 평화 진실은 힘을 길러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진리를 조상님들이
피땀눈물로 보여주셨다고 생각하면 후손들이 명심하고 나라를 발전시키고 자주국방력을
더욱더 끼워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금치에 대한 전술적인 설명이 미흡한게 대단히 아쉼네요
전술이라고할만한게 없는게 아닐까요?
@@user-rv8uo8ep6k 글쎄요 첫째 돌격때 개박살난후 기동로에 대한 몇가지 의견도 있었고 전봉준이 단순하게 전략능력이 없다 이렇게만 서술돼는데 전멸까지 꽤 시간이 있었고 여러번 돌격이 있었는데 왜 그럴수밖에 없었는지 고찰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이정도 깊이까지 들어가려면 거의 학자급 사료수집 능력이 있어야 하니 아쉽다 정도지만 말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금치에 대한 지형도, 그에 대한 한정적인 이동방향, 일본군과 관군의 배치도 등등 전사이해에 필수인 내용이 거의 없으니 이부분을 보강하지 않는다면 이 채널의 중요도는 그냥 교과서에 나온 내용 이하이상도 아닐것입니다
@@있어빌리티-k5r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항상 원고작업하면서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시간에 쫒겨 자료수집이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다른 많은 전쟁사 관련 전문가들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ㅜㅜ 추후로는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이 참패한 요인
1.농민군의 대다수가 화승총과 창칼등 열악한 무기로 무장
2.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못함
3.지도부의 신식화기 관련 지식+전술 지식 부재
언제 새로운 영상 게시가 되나요? 계속 눈팅중인데 ㅜㅜㅜㅜㅜㅜㅜㅜ
오 정말 궁금했던 전투사.
무술만 익히면 대포도 막을수 있다던 의화단 운동과도 너무 흡사했죠. 이러고도 고종은 3년후 대한제국이라는 광대쇼를 했으니... 임진년이후의 조선역사는 정말 볼것이 없는 역사였죠. 이것이 일진회의 시작이 된것도 역사의 아이러니...
희화단(×) 의화단(ㅇ)
그리고 임진년 이후에도 영조 정조 등 유능한 명군들은 있었습니다
@@jhtiger1104 글쎄요ㅡㅡㅡ 난 그렇게 평가가 안되네요.
조선 후기를 보면 일본이나 다른 열강에 먹히는건 당연하다 생각되네요. 물론 강제 병합은 절대 옳은 것이 아니지만 미국도 다 쓰러저가늨 스페인 붙들고 패서 필리핀,쿠바 뺏었고 영국,프랑스는 전 세계를 상대로 일본이 우리나라한태 했던 짓을 했으니...
영상을 제대로 안보신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관군이 주가 되어 일방적으로 학살한 전투입니다. 일본군은 예비대로 200여명만 참전했을 뿐이고 관군 자국민을 쓸어버린 셈
그 관군을 투입하고 지시한 사람이 고종인가요.
기관총 야포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정부중앙경군들이었죠
너무 슬프다ㅠㅠ
조선이 세워진 14 세기와 망할 시기였던 19세기가 과학 기술수준은 비슷했다는데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개차반이었는지 새삼 느낀다
텐진조약1885년 입니다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 청나라 조약 입니다
1:07 그냥 반자이 돌격이내 ㄷ
무능한임금고종
역대최악의군주중하나!!
이런군주가 무슨독립을위해 애섰다고하니
이러니 나라가망했지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위험하다~ 만고의 진리.
노르만 군대한태 명군 알렉시오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군 박살났던 뒤라키움 전투도 다루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틀링 기관총 사수, 부사수는 누구였나요?
7:55 체 가 아니고 채 입니다. 그리고 동학군을 학살한건 일본군이 아니고 관군입니다. 계속 영상에서 진압군이 일본군인 것 같은 사진을 올리네요.
동학을 진압한건 관군이맞습니다.
주로 관군 케들링에 학살됨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 일본이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도 있었죠.
1858 텐진조약 깜짝 놀랐네요 이건 수정을 해주셔야...
무능한 민비와 고종 양반 탓이지
조병갑의 후손이 전 민주당? 열우당 의원 조기숙? 이었던가..역사적 사실이 현실과 연결되어 놀랐던
박정희가 알고보면 저 때 참가했던 사람의 아들인지 손자라는 것도.. 아이러니죠.
한심한건가, 무지한건가?
백성보다 못한 임금이라니...
역사 교육은 계속 되어야 한다.
비참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인류사적인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로즈니 공방전해주세요~~~
우리나라는 문관(법, 행정)이 절대 정치에 나서서는 안되는 나라임.
군인과 연구자, 상공인들이 주도권을 잡았을때 나라도 강성하고 발전할 수 있었음.
이건 뭐 분석할 가치도 없는 전투 아닌가? 아니 기관총 화망안으로 좁은 고갯길에서 부적붙이고 죽창들고 돌격했다는데 더 이상 뭔 이야기를 할까? 비슷한 시대에 영국과 싸웠던 줄루족도 이렇게는 안 싸웠다. 군사령관의 역량을 평가한다면 졸장 중의 졸장이라고 밖에는 무슨 말을 할까?
ruclips.net/video/zw4_EW2aOEQ/видео.html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줄루족이랑 맞짱 떠도 질 듯....
전봉준은 심지어 한두번 실패한 것도 아니고 수십차례나 잘못된 전술을 썼으니 녹두'장군'이란 표현마저 좀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군사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 보고 비난하는게 말이되나? 군사 교육 제대로 받은 장군들도 뤼순 공방전이나 1차 세계대전에서 무리한 고지 돌격으로 패퇴했었다.
조선말기 조정은 문제가 많았음.
탐관오리 천지에다가
숫자가 얼마안되던 외국 군대도 하나 통제 못했으니 말이죠.
당시 일본 군대가 아무리 쌔다해도
일단 일본을 떠나 조선에 발을 붙인 이상은
보급 문제로 계속 싸울 수는 없기 때문에.
일본군이 조정을 장악하기 전 충분히 막을 수도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고종이 감금 당해버릴 정도면
망해도 이미 망해버릴 정도였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구지 동학이 아니여도 조선은 일본에 먹히게 되있었던 것이라 보죠.
글타고 동학이나 천도교 편드는 것은 아니고요.
구테타로 바뀐 세상도 여럿있지만 할려면 좀 쳬계적으로 하던가하지
무수한 조선 양민을 죽게한 그 수뇌부도 상당히 무식한 거죠.
정보부족=패배 라는게 역사의 진리
사회가 발전하려면 위정자들이 깨끗하고 현명한 것도 중요하지만 민중들이 아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이런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수만명의 사람이 모였는데 기본적인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니... 그리고 기관총 앞에서 주문을 외우는 미신에 심취해 있으니 신문물로 무장한 일본을 이길 수 없는 법이죠. 민중이 깨어나야 시대가 발전합니다.
근데 어쩔수 없었지 냉병기 시절 병법이면 모를까 근대 전투의 병법은 그때와 180도 다르니
개돼지가 깨어날 일 절대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몇가지 사소한 오류나 순서오류가 있네요
텐진조약 날자라던가하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동학군은 엄연히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동학이라는 사이비종교가 창설한 사설반란군이었습니다. 아무리 조병갑이 탐관오리라고 해도 당시는 엄연히 조선전제군주시대였고, 이런 시대에는 백성은 왕의 대리인인 관리들이 부당하게 때려도 그냥 군소리 없이 매맞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이 외세에 힘을 빌려서 동학군을 진압한 것은 민족사적으로는 비난 받을 수 있지만 당시 조선조정입장에서는 하나의 통치 옵션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조선 관군들의 개틀링 기관총은 어디서 왔을까요. 외세의 지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게틀링 기관총의 무서움을 경험한 동학의 후예들은 이후 일본에 붙어서 일진회를 만듭니다. 물론 나중에는 일본에 배신당하지만 결국 조선조정과 동학교도들 모두 바뀐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들끼리 집안싸움하다가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겁니다. 물론 조선조정의 왕족들은 대부분 일본제국의 패망전까지 대우받으며 일본에서 잘살았습니다. 배신당한 일진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죠. 동학과 조선조정 둘다 조선 전제군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차피 동학에 가담한 대부분의 민중들도 배고파서 가담한 거지 무슨 큰 뜻이 있었다고는 생각안합니다. 이시기 대다수 동학교도들의 입장은 한양의 임금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화를 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식층대다수가 주자학을 배우다 보니 임금이 배고픈 우리를 돌봐야하는대 맨날 못된 놈들만 관리라고 보내니 얼마나 화가 날까요. 문제는 그못된놈들도 그나름의 못되진 사정이 있다는 겁니다. 당시의 조선경제는 가렴주구라는 잘못된 경제구조를 운영하지 않으면 나라가 안돌아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매관매직이 성행하니 당연히 청백리하는자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자겠죠. 여기에 윗선에서는 어째서 상납이 없냐고 엄청 갈굴겁니다. 조병갑은 조선이라는 왕조체제에 지극히 충실한 인간이었습니다. 그시기 청백리 없었습니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했지요. 결국 조선은 그자체의 절대군주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이후 조선민중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사람들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고난의 시간들이 필요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야하며 우리가 세계를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만 보다가는 오늘날의 아프간이나 우크라이나의 신세를 면치 못할 거라고 봅니다.
냉정한 지적입니다
사실 동학 혁명이 아니라 동학난이 맞는 표현이죠
혁명의 전제 조건은 구시대의 타파인데 동학은 그게 아니었으니까요
동학세력을 정치적으로 이용 했던 대원군만 꿀을 빤거죠
기관총은 외세의 지원이 아니고 돈 주고 산 것입니다. 조선이ㅣ 그정도 거지국가는 아닙니다
조선조정이 아니라 민비일족임. 민비가 동학군의 군세가 심상치 않자 임오군란때 호되게 당한게 떠올라 일본에 원조 요청한 거임. 나중에 민비가 청나라로 갈아타니 일본입장에서는 여우 사냥을 할 수밖에 없는거고.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스스로 자립해서 잘커봐야 태국 수준이 한계입니다.
고종이 엄청난 천재라서 조선을 잘운영했어봤자. 태국을 넘긴 힘들었을겁니다.
그런점에서 보면 태국왕이 대단해 보입니다.
물론 태국 국민들에게 좋은거 아니지만요.
애초에 프랑스 혁명의 시작도 거추장한 이념 같은게 아니라 사치, 수탈, 세금 같은 문제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피폐해진게 원인이었습니다. 혁명 직전 프랑스 민중들도 굶주림에 시달렸어요.
신앙의 힘으로 부적을 부치고 죽어도 전진 전진...대참살..임진 왜란때 진주성2차 전투도 비슷..일본군도 종전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니 더 싸우기 싫어..히데요시 명령이니 진주성만 비워주면 하는척만하고 갈테니까 했는데도 ..쓸데없이 성 지키고 싸우다 다 학살..
사실상 전투에 무지했던 전봉준이 패전했다고 다들 욕하지만 그보다 더나쁜건 일본군과 합세해 같은동족 학살에 앞장선 관군들이야말로 더 때려쳐죽일 놈들이었고 오히려 욕을 처먹어야 되는일 아닌가?
상대에 비해 너무도 열악한 전투를 벌여 비록 패하긴 했지만 외세와 불의에 저항했던 동학의 정신마저 깡그리 무시당한채로 욕먹을 일인가? 그러지마라 어리석은 후손들아.
군사적지식이 없어도 좁은 산길을 공격하는 건 무리인건 생각해볼 수 있는데 ㅜ한국전쟁 때 중국군이 사용한 전술처럼 밤에 이동해서 포위공격하는 방법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농민반란의 한계인가...
우금치에서 배워야하는데....
동학농민군이 태인전투를 끝으로 와해되었다고 하시는데 그건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만 와해 되었을뿐 북접군은 건재했고
이방언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장흥부를 점령하기까지하고 12월 말까지 격전이 계속되었습니다 가장 최후의 전투가
1895년 2월 18일에 25명의 농민군 접주급들이 항전한 대둔산 전투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 마지막 전투까지 참여했습니다
우금치 전투가 끝이 아니에요(그리고 농민군 잔여세력들은 1899년 농민봉기까지 일으킴)
새로운 영상 언제 업로드 됩니까?ㅜㅜ
열심히 작업중입니다 빠르면 이번주말전엔 업로드 가능할듯합니다!
@@defeatube 넵!!!!!^ㅎ^ㅎㅎㅎㅎㅎㅎㅎ
진짜 댓글들 어메이징하다. 탐관오리에 의한 착취, 계급적 착취에 못이겨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당연한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학농민운동은 사이비종교라느니 이후에 일진회가 되었다느니 대체 이런게 뭐가 중요함?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댓글만 보면 무슨 탐관오리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거고 들고 일어난 농민들은 쳐죽어도 할말 없는 놈들 같네 진짜 어질어질하다. 아니 그냥 '탐관오리의 횡포와 계급적 차별이 극심해지니 농민들이 이에 반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라고 단순하게 정리하면 안됨?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듦?
그러게요 댓글보니 진짜 어메이징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 저기 댓글들 보니 참 가관이내요
거의 자해수준입니다
인정합니다 역사를 못배우고 무식한놈들 천지인듯요
근자감의 최후 ~~🤪🤪🤪🤪
기관총에 농기구라.... 이게 전투냐 학살이지ㅉㅉ 반자이돌격의 원조가 조선이였군요
청산리 전투도 국뽕류 이듯,미흡한 준비, 좁은시각으로 떼죽음 당하고, 외세 개입의 명분만 제공한 어설픈 동학운동도 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어이가 없네.
제대로된 교육도 받은 적 없던 피지배 계층의 생존형 봉기를 그렇게 밖에 못보냐.
엘리트들이 죽 쑤고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거지...
라스트 사무라이는 메이지유신 당시 삿초 동맹군이 막부타도하는 과정에 신구대립에 정통성을 위해 천황이 중심이라는 체제개편 종식후 신식 군대 무장한 막부폐지후 일본 중앙 정규군이 그걸 그대로 우금치에서 조선동학은 폭도들이 중심인 대의가없던 농민반란을 상대로 군사상륙 사전 실전 훈련한것임
청일 양국이 동시에 조선에 파병한다는 내용의 톈진조약은 1858년 조약이 아니라, 갑신정변 후 청일양국간 맺은 1885년 톈진조약입니다.
톈진조약이 여러개가 있는데, 헷갈리셨나 보네요.
아 그렇군요 ㅜㅜ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그냥 시위군중들이 때로 몰려 올라가는 거지.
우금치전투..
당시 동학농민국은 부적을간직하고다니면서, 전투를했다고들었습니다. 얼마나 무모한 공주 우금치전투 인지?
따라서, 지금 우리는 과거의 뼈아픈역사를 꼭 기억하고, , 자주국방에 총력을기울여야겠습니다
네, 깊은관심 매우 고맙습니다. ^^
전투에서 신념은 엄청난 시너지...딱 거기까지..나머진 지도자의 역량!
마치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과 같이..무모한 돌격이었죠
전봉준은 대규모 돌격이 학살에 가까운 전술인걸 직접 보면서도 수십차례나 돌격을 시키다니...
20세기에도 썼다는게 아이러니
잘못된 설명이 있군요, 1858년 텐진조약이 아니라 1884년 텐진조약입니다 . 갑신정변이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동시출병을 약속한 내용입니다. 이미 1882년 임오군란이후 조선왕조는 외세에 국방을 맡겨버린 셈이었지요
고종 정말 꼴도 보기 싫타 무능력한 🐕
너무나 영화같았던 라스트 사무라이 실사판 우금치
조선을 한반도의 치욕이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우금치에 다 들어있음
정말 싸움을 못하는건 그렇다쳐 어떻게 하나같이 전술이 다 저 모양인지 ㅎㅎㅎㅎ
저런 3류들을 혁명이라는 그럴사한 단어로 빨아야 하는게 국사라면
차라리 안가르쳐 주는게 낫다고 봄
상식적으로 군사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 보고 비난하는게 말이되나? 군사 교육 제대로 받은 장군들도 뤼순 공방전이나 1차 세계대전에서 무리한 고지 돌격으로 패퇴했었다.
저런것들이 그저 당시 집안사정 좋아서 장교,장군이 된거고 그런것들이 전투를 지휘하니 그런 꼴 나는겨
라스트 사무라이는 메이지유신 당시 삿초 동맹군이 막부타도하는 과정에 신구대립에 정통성을 위해 천황이 중심이라는 과정에 신식 군대 무장이고 그걸 그대로 우금치에서 조선동학은 폭도들이 중심인 대의가없던 농민반란을 상대로 군사 상륙위한 사전 실전 훈련한것 같네요
@@GR8ElitesPower '라스트 사무라이(2003)'는 세이난 전쟁을 모티브로 삼았죠.
여기 댓글에서 동학군도 개틀링건을 수중에 넣었다는 이야기 있기에 전봉준의 돌격전술에 대해 전봉준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즉 동학군도 개틀링을 쏘아본 결과 급속가열과 정비불량으로 고장이 잘 나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거죠. 임란때도 대마도에서 바친 조총을 쏴보고 신립장군이 쏜다고 다 맞냐 라고 햇듯이 말이죠. 즉 숙련자와 이 병기의 효율적 운용전술이 있을수도 있게다는 것을 생각 못 한 결과. .신립의 탄금대 전봉준의 우금치가 발생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돌격시킬때 획득한 개틀링을 쏘아본 결과 곧 고장나리라 믿고 돌격시킨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첨단무기라해도 관리와 훈련이 중요하죠.
미군이 천조라는 국방비를 쓰는 것도 사실 따지고보면 다 관리비용, 훈련비용.
군대에 대한 이해가 동학군은 없었던 거죠. 구식군대든 신식군대든 장비의 관리와 훈련은 필수고 여기서 전술운용이 나오는 건데 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기관총에 총알이 없으면 그냥 금속 덩어리일뿐이죠. 그래서 보급이 중요한겁니다.
동학군이 총을 얻은들 총알도 쉽게 구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주문을 외며 기관총 앞으로 닥돌이라니 1차대전보다 훨씬 원시적인듯 이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네 패전사에 넣을게 아니라 학살사에 넣어야할듯 ㅎㅎ
이렇게 꼬라박으로 죽은 전투가 없었다는건 무슨소리인지 게틀링건에 검색만해봐도 이무기 자체가 게임체인저였고 그후로 전략자체가 바뀌고 참호전하고 탱크나오고 이걸몰라서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선말기 병폐가 심각한 상황에서 그러한 것을 바로잡고자 일어난 민중운동이 바로 동학농민운동
시대적 한계로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 의의는 되새겨야 합니다
동학에도 많은 무리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나중에 아시아의 나치 일본에 부역하게되는 일진회무리도 있었던 반면
왜.구들을 파리잡듯 했던 김구선생도 청년기를 동학에 몸담았었죠
영아살해까지 했던 김구를 선생이라니요
당장 유튜브 김구의 실체 를 검색해보십쇼
지금까지 알려진 김구의 여러 기록들이 모두 증거도없이 김구 스스로가 자화자찬 왜곡질한 허풍이란것과 실제 기록 증거는 중공을 뒷배후로 친중하던 시정잡배였다는걸 알게 될겁니다
의의는 무슨
김구청문회라는 책보면 기겁 할겁니다.
혹시라도 그책을 의심할까봐 저자를 말씀드리면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일하던 사람이 쓴책입니다.
해당 영상은 동학측의 입장에서 다룬거라 동학농민전쟁 시기 조선군에 대해서는 해당 블로그의 조선후기 ~ 대한제국 카테고리의 동학농민전쟁 글들을 읽어보는게 났습니다
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kumi17cs1013&logNo=221546312593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오로라님의 블로그에서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당시 일제가 나쁜건 아는데..
지구 반대편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100년도 안되서 대등한 국력까지 발전시키고, 유일하게 동양에서 근대화에 성공한거 보면 본받아야 된다고 봄
일제를 배워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배워야지
@@jmhan4219 일제가 제로 전투기 만들때
ㅈ선은 인력거 만든게 팩트라는걸 알길 바란다 ㅉㅉ
좋은건 빨리받아들여야됨 맨날 선비타령만하니까 이런일이생기는거 팩트임
죽음을 넘어...시대의 어둠을 넘어....민비라는 바위에 시민은 계란으로 부딛혔지만...계란은 깨어나서 끝내 그 바위를 넘어선다...
그리고 후라이드 치킨이 되어버렸다...
죽창들고 싸워도 머리를 써서 전략적으로 싸워야지 닥돌하면 어떡하노
모르죠 흥선 대원군이 동학은 이제 필요 없으니 팽한 것일 수도
손자병법도 안 읽어본게 확실해요;;; 우금치 고개를 포위해서 돌격했으면 훨씬 나았을 듯..
그냥 이씨조선이라서 저렇게 된거다. 이씨조선 잘 망했다.
전주성 점령할 시기가 하늘이 준 기회였는데 속도 타이밍 시간 한양 점령해서 왕이랑 기득권 도륙했으면 역사 어떻게 바뀔지 평행 우주가 존재하다면 그런 역사 진행될수도
애초에 왕 갈아엎을생각 없었음
드라마 명성황후 찌질이 묘사해는지 이해가죠 자국민 외국 연합해서 도륙하라고 결재한 인간인데 망국의 왕이라고 쉴드 쳐주는거도 한계 있죠
전투라고 보기엔
전봉준이 군사적인 능력이 없었다기보다 그냥 총이라는 개념이랑 전술에 대해 아는게 없는게 더 큰듯
봉기가 30년정도 뒤에 일어났다면 백병전이 아니라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갉아먹었을듯
야간 기습을 하지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외제 대량살상무기로 국민들을 학살한 건 통탄할 일입니다.
일본군이 경복궁 기습해서 점령하고 고종을 볼모로 삼아서 조선군은 전혀 힘도 못쓰고 일본군에 이용당했어요
동학농민군 은1차봉기는 보국안민 으로
내부개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2차봉기는 척양척왜로 항일투쟁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저글링 대 스팀팩파벳...
난 솔직히 유력대권후보가 대동을 강조할때 이 사건 생각나 무서웠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민노총 전교조네 ....ㅋㅋㅋㅋ
훠어 돌격하쉽쉬요 훠어어
진압당한거지~ 무슨 전투인가
경복궁지을 돈으로소총을 샀더라면 이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소총 구매했죠. 당시 조선군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하려고 레밍턴 롤링블록 소총과 마티니 핸리 소총, 마우저 1871, 그리고 그라스 소총도 구입했는데 외교와 정치적인 이유로 구입하다 보니 호환이 안됐죠.(단, 레밍턴 롤링블록과 마티니 핸리 소총은 탄약이 호환됐습니다.)
그 결과 보급에 큰 차질을 빚었죠.
조선군 무기는 많고 화려했지만 오히려 일본보다 무장 자체는 더 고급졌음. 영상에 나오는대로 일본군이 경복궁 기습해서 점령하고 고종을 볼모로 삼아서
조선군은 전혀 힘도 못쓰고 일본군에 이용당함 영상에 나오는 내용인데 영상 제대로 보기 바람
조선군도 당시 기관총부터 야포까지 신식무기를 다수 갖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기만 있었고 쏘는 법 정도만 알았지 어떻게 전술을 활용해야 되고 이런 부분은 잘 몰랐습니다.
조선정부에서 서구열강의 소총을 꽤 구매했지만, 여러 국가의 총을 다양하게 구매하는 우를 범해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GoodBoy-wd9iy 그 이유가 군사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외교적인 이유가 있었죠. 거기다 조선에 온 미국인 장교 다이 장군의 일기에 따르면 조선도 탄약 일원화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고 하죠.
걍 ㅂㅅ같은 전투였음
힘없으면 당한다
요즘은 돈없으면 당함 시발
우금치 전투가 아니라
우금치 살륙이지
시산혈해 과거시험합격자는
어다로 갔어 저 합격자를
잡아서 죽여야 했어
현재는 사시.변시지
전봉준장군은 거의 정신적지주개념이고 지휘하기로 하던 장수는 부친이 전날 돌아가셔서 상주된 도리를 지킨다고 집으로 돌아갔고, 총 모인 농민 5만여명중 실제로 좁은 지역에 밀려 들어갈수 없어서 싸울 1만여명을 제외하고 모두 돌려보냈슴니다
야사개념의 뒷이야기나 알지못하는 정보는 정말 잘조사하셨는데 이번거는 일정부분 부족하네요
감사합니다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망사지
다시는 다시는 지배 받으면 안된다.
나라를ㅡ지킬ㅡ마지막ㅡ세력이지ㅡ이후는ㅡ없어ㅡ김일성ㅡ그냥ㅡ소대지ㅡ사람같지도ㅡ않는조선왕중ㅡ제일ㅡ멍청한ㅡ고종ㅡ지손으로ㅡ충신ㅡ다죽인거지
그러니까 말을 들으라고 말을
꼭 말안듣는 놈들이 개주금당하지 ㅉㅉ
@@partisanmoon9187 누구말 ? 매국노들? 아님 일본군? 말잘듣는 몇몇 매국정치인들땜에 나라를 일본입에 넣어줬는데 그나마 항거한 동학정신을 칭찬을 못할망정 말안들어 떼죽음당했다고 지적질할 일인가?
이것 패스다 불쌍하다 .보기싫네
군사능력을 가지지 않는 혁명은 역사적
혁명으로 기록될뿐~^^
차라리 중공군처럼 피리불고 꽹과리치고
난리라도 하시지~"
중공군이 피리부는 이유는 포위 공격중에 적의 뒤의 아군에게 동시 돌격 신호입니다. 전술로 이미 이기고 있는 상황이죠
중공군은 총알받이용 군사와 주력으로 쓸 군사정도는 구분해서 이용했어요
그리고 상대방의 약점인 남한군을 집요하게 노리는 전략적인면도 노련했습니다.
그러니 미군도 그렇게 고전했던거죠
흑역사;;
전봉준이 사람이 맞나